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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매헌 윤봉길 의사 순국 제89주기 추모식 / 2021.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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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 이하 보훈처’) 일제에 폭탄을 투척해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린매헌 윤봉길 의사 순국 89주기 추모 12월19() 오전 11, 효창공원(서울 용산구, 윤 의사 묘소)에서 진행된다고 밝혔다.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회장 명노승, 이하 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진행되는 이번 추모식은 로나19 확산 예방을 위해 외부인사 초청을 최소화한 가운데 황기철 보훈처장, 명노승 기념사업회장, 독립유공자 유족 등이 참석한다.

 

추모식은 국민의례, 약전 봉독, 추모식사, 추모사, 헌화분향, 유시 낭독, 추모가 등의 순으로 진행되며, 행사에 참석하지 못하는 분들과 국민의 참여를 위해 유튜브를 통해 실시간으로 중계된다.

 

한편, 기념사업회에서는 윤봉길 의사의 정신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윤봉길 의사 상하이 의거 기념식’, ‘백일장 공모전’, 배용순 여사 기념 효부상 시상식기념음악회등을 매년 개최해오고 있다.

 

기념사업회는 내년도는 윤봉길 의사 순국 90주기인 만큼 다양하고 의미있는 행사를 기획하여 청소년을 비롯한 많은 국민들이 윤봉길 의사의 정신을 기억하고 계승할 수 있는 자리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윤봉길 의사 주요 공적]

 

ㅇ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5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8년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3ㆍ1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식민교육을 배척하여 학교를 자퇴하고 사설 서당인 오치서숙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ㅇ 1928년에는 부흥야학원을 세워 농민의 자녀를 교육시켰고, 이듬해에 월진회를 조직하여 농촌운동을 전개하였지만, 일제의 압박으로 농촌운동이 성공할 수 없음을 깨닫고 1930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ㅇ 윤 의사는 1931년 중국 상해에 도착하여 조국독립을 앞당길 수 있는 길을 찾던 중 중 마침내 대한민국임시정부 지도자인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의열투쟁의 결의를 다졌다.

 

ㅇ 윤 의사는 의거 3일 전인 4월 26일에 의거가 개인적 차원의 행동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의사의 대변이라는 점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백범 선생이 주도하던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ㅇ 마침내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맞아 일본군의 상해점령 전승 경축식이 홍커우공원에서 열렸다. 윤 의사는 오전 11시 40분경에 수통형 폭탄을 단상 위로 투척하였고,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과 함께 폭발하여 파편이 사방으로 날았다. 이 의거로 시라카와 대장과 가와바타 거류민 단장은 사망하였고, 노무라 중장, 시게미쓰 공사 등이 중상을 입었다.

 

ㅇ 또한, 이 의거는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중국의 지원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ㅇ 윤 의사는 의거 직후 현장에서 일경에게 체포되고 상해 일본 헌병대에서 가혹한 고문과 취조를 받았으며, 그해 5월 상해 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ㅇ 그리고 12월 19일 가나자와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25세 나이로 총탄을 맞고 순국하였다.

 

ㅇ 윤 의사의 유해는 김구 선생의 요청에 따라 이봉창·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봉환되어 1946년 효창공원 삼 의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ㅇ 정부에서는 윤 의사의 공적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황기철 보훈처장은 추모사를 통해 순국 제89주기를 맞아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생을 바치셨던 의사님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애국혼을 엄숙한 마음으로 되새기며, 후손들에게 온전히 계승하기 위해 앞으로도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힐 것이다.

 

"본 저작물은 국가보훈처에서 '2021년' 작성하여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보도자료를 이용하였으며, 해당 저작물은 정책브리핑 사이트  www.korea.kr 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