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오는 15일(목) 제74주년 광복절을 맞아 지난 1919년 4월 경기 화성시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징역 12년을 받은 이봉구(李鳳九) 선생과 광주학생운동의 도화선이 된 박기옥(朴己玉) 선생 등 178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한다.”고 밝혔다.
○ 이번에 포상되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49명(독립장 1, 애국장 8, 애족장 40), 건국포장 28명, 대통령표창 101명으로, 이중 생존 애국지사는 1명(백운호, 89세)이며, 여성이 10명이다.
건국훈장 독립장 (1명)
이봉구 李鳳九 (3·1운동)
건국훈장 애국장 (8명)
권덕규 權悳奎 (문화운동)
김한정 金漢貞 (국내항일)
김흥식 金興植 (3·1운동)
박영문 朴泳文 (3·1운동)
이종필 李鍾弼 (국내항일)
전도선 全道善 (3·1운동)
황석현 黃奭顯 (만주방면)
황칠성 黃七星 (3·1운동)
건국훈장 애족장 (40명)
강평국 姜平國 (일본방면)
김경신 金敬信 (3·1운동)
김근식 金根植 (3·1운동)
김동섭 金東燮 (학생운동)
김복개 金福介 (만주방면)
김봉근 金奉根 (3·1운동)
김정국 金正局 (국내항일)
김정수 金丁洙 (3·1운동)
김종태 金鍾台 (3·1운동)
남호섭 南灝燮 (3·1운동)
문병무 文秉武 (3·1운동)
박금우 朴금우 (미주방면)
박병주 朴秉珠 (만주방면)
박종은 朴鍾恩 (국내항일)
박춘언 朴春彦 (의 병)
서도인 徐度寅 (국내항일)
서병돈 徐炳敦 (3·1운동)
서성칠 徐星七 (3·1운동)
서영완 徐永琬 (중국방면)
염준모 廉準模 (국내항일)
우용현 禹鎔鉉 (국내항일)
유병민 劉秉敏 (3·1운동)
유창덕 劉昌德 (국내항일)
유창열 劉昌烈 (국내항일)
윤덕룡 尹德龍 (국내항일)
윤학송 尹學松 (3·1운동)
이규직 李奎直 (3·1운동)
이완백 李完伯 (국내항일)
이혜근 李惠根 (노령방면)
임창모 林昌模 (미주방면)
전옥결 全玉玦 (3·1운동)
전홍기 全洪基 (학생운동)
정동화 鄭東華 (국내항일)
정암우 丁岩右 (일본방면)
정호근 鄭鎬根 (3·1운동)
조흥환 曺興煥 (학생운동)
최차도 崔次道 (학생운동)
현호옥 玄好玉 (일본방면)
홍재설 洪在卨 (계몽운동)
홍재하 洪在厦 (구주방면)
건국포장 (28명)
국채진 鞠埰鎭 (국내항일)
김귀문 金貴文 (국내항일)
김영기 金永琪 (3·1운동)
김장수 金長洙 (3·1운동)
김태근 金泰根 (국내항일)
김판철 金判哲 (3·1운동)
김효배 金孝培 (일본방면)
박광남 朴光男 (3·1운동)
박기호 朴基豪 (국내항일)
박찬문 朴贊文 (3·1운동)
배종훈 裵鍾勳 (학생운동)
배창아 裵昌兒 (국내항일)
유석순 兪錫順 (3·1운동)
윤석봉 尹錫鳳 (의 병)
이고명 李高命 (국내항일)
이국표 李國杓 (3·1운동)
이기하 李起夏 (3·1운동)
이병환 李炳煥 (3·1운동)
이조헌 李兆憲 (중국방면)
장용근 張用根 (3·1운동)
전사옥 全駟玉 (학생운동)
정영운 鄭永云 (국내항일)
제갈관오 諸葛寬五 (중국방면)
조흥종 趙興鍾 (3·1운동)
주장암 朱張岩 (3·1운동)
최풍룡 崔豊龍 (국내항일)
홍금돌 洪今突 (3·1운동)
황맹석 黃孟錫 (3·1운동)
대통령표창 (101명)
강사채 姜四采 (학생운동)
강자연 姜子然 (의 병)
강준구 姜俊求 (3·1운동)
구창서 具昌書 (3·1운동)
권봉화 權奉和 (3·1운동)
권임상 權任相 (3·1운동)
권중원 權重遠 (의 병)
김공서 金公西 (의 병)
김기동 金基洞 (3·1운동)
김두채 金斗采 (학생운동)
김민석 金玟錫 (학생운동)
김사현 金士賢 (3·1운동)
김상원 金相元 (3·1운동)
김성한 金星漢 (3·1운동)
김성환 金成煥 (국내항일)
김순언 金順彦 (의 병)
김시찬 金時贊 (국내항일)
김여옥 金汝玉 (3·1운동)
김용응 金鏞應 (국내항일)
김장학 金章鶴 (3·1운동)
김정희 金錠熙 (3·1운동)
김진영 金鎭永 (3·1운동)
김창윤 金昌允 (3·1운동)
김필호 金弼浩 (3·1운동)
김학선 金學善 (3·1운동)
김한용 金漢龍 (3·1운동)
김현균 金玄均 (3·1운동)
김홍기 金洪基 (3·1운동)
남궁우룡 南宮又龍 (3·1운동)
노성용 盧成用 (3·1운동)
모재명 牟才明 (3·1운동)
문종석 文鍾錫 (3·1운동)
민성숙 閔成淑 (3·1운동)
박계수 朴桂壽 (일본방면)
박극수 朴克壽 (3·1운동)
박기옥 朴己玉 (학생운동)
박덕주 朴德柱 (3·1운동)
박상선 朴尙鮮 (3·1운동)
박생진 朴生珍 (국내항일)
박창규 朴昌奎 (3·1운동)
배광석 裵光錫 (3·1운동)
백운호 白雲豪 (국내항일)
복만길 卜萬吉 (국내항일)
서가마 徐加馬 (국내항일)
서병규 徐丙珪 (3·1운동)
서봉운 徐奉雲 (3·1운동)
서승효 徐承孝 (국내항일)
손정채 孫正彩 (국내항일)
송계득 宋癸得 (3·1운동)
양만석 梁萬石 (3·1운동)
유동복 柳東馥 (3·1운동)
유만수 柳萬壽 (3·1운동)
유연기 柳淵琦 (3·1운동)
유영하 柳永夏 (학생운동)
유한종 劉漢鍾 (3·1운동)
윤경문 尹京文 (국내항일)
윤화정 尹和鼎 (3·1운동)
이경재 李敬載 (국내항일)
이계동 李啓東 (3·1운동)
이규연 李圭連 (의 병)
이상준 李相俊 (3·1운동)
이승우 李承祐 (3·1운동)
이영직 李英稙 (3·1운동)
이오길 李吾吉 (국내항일)
이용선 李容先 (국내항일)
이원섭 李元燮 (국내항일)
이원영 李遠榮 (국내항일)
이인희 李仁熙 (학생운동)
이창규 李昶奎 (3·1운동)
이창신 李昌信 (학생운동)
이판쇠 李判釗 (3·1운동)
이학서 李鶴西 (3·1운동)
임영식 任永植 (3·1운동)
장영안 張永安 (3·1운동)
장태중 張太仲 (3·1운동)
전병창 全炳昌 (3·1운동)
정경식 鄭景湜 (일본방면)
정규원 丁奎源 (3·1운동)
정삼모 鄭三模 (3·1운동)
정수만 鄭水萬 (3·1운동)
정순완 鄭淳完 (3·1운동)
정희근 鄭禧根 (3·1운동)
조경제 趙京濟 (3·1운동)
조만봉 趙萬琫 (국내항일)
조용명 趙鏞明 (3·1운동)
조용철 趙龍喆 (3·1운동)
조해규 趙海奎 (3·1운동)
주승환 周昇煥 (3·1운동)
차학봉 車學奉 (3·1운동)
최갑쇠 崔甲釗 (3·1운동)
최규원 崔圭元 (국내항일)
최만화 崔晩華 (3·1운동)
최선유 崔善有 (3·1운동)
최준달 崔俊達 (3·1운동)
최현수 崔賢守 (학생운동)
한상엄 韓相嚴 (국내항일)
홍순정 洪淳鼎 (만주방면)
홍태식 洪台植 (만주방면)
황순태 黃順泰 (3·1운동)
황오봉 黃五峰 (3·1운동)
황정수 黃正秀 (3·1운동)
○ 훈․포장과 대통령표창은 제74주년 광복절 중앙기념식장과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기념식장에서 본인과 유족에게 수여된다.
○ 15일(목) 중앙기념식에서는 포상자 중 유일한 생존애국지사로 항일비밀결사에 참여하고 1942년 사회 질서와 안전에 해를 끼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고초를 겪는 등 조국독립에 기여한 백운호 선생(대통령표창)이 직접 포상을 받을 예정이다.
- 또한, 1925년부터 제주청년연합회 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1931년 6월 비밀결사에 참여해 활동하다 체포돼 징역 5년을 받은 고(故) 김한정 선생(남, 건국훈장 애국장)과 1920년 7월 프랑스에서 재법한국민회 제2대 회장으로 활동하고 같은 해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전달하는 등 조국독립에 기여한 고(故) 홍재하(남, 건국훈장 애족장) 선생의 증손과 자녀가 각각 포상을 수여받는다.
- 여기에 1919년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사무국 사리원 지국장으로 항일선전문을 배포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돼 징역 7개월을 받은 고(故) 제갈관오(남, 건국포장) 선생과 1929년 10월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일본인 학생들에게 희롱당해 광주학생운동의 도화선이 됐고, 백지동맹에 참여한 고(故) 박기옥(여, 대통령표창) 선생의 손자와 자녀가 각각 포상을 받을 예정이다.
□ 이번 포상을 포함해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분은 1949년 포상이 시작된 이래 건국훈장 11,014명, 건국포장 1,308명, 대통령표창 3,367명 등 총 15,689명(여성 444명)에 이른다.
□ 앞으로도, 보훈처는 “독립기념관, 국사편찬위원회, 국가기록원, 지방자치단체, 문화원 등 유관기관과 사료수집 등 협업을 활성화하고, 국내외 소장 자료를 지속적으로 수집함으로써 독립유공자 발굴·포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그 분들의 나라사랑 정신과 독립정신을 드높이는 노력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 포상자 중 주요 인물들의 독립운동 공적은 다음과 같다.
❖ 격렬한 투쟁으로 무단통치의 폭압에 항거한 투사, 이봉구 선생
3․1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중형을 받은 이봉구(李鳳九) 선생께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서울 순화동의 한 여관에서 고용인으로 일하던 중 1919년 4월 경기도 화성시 장안․우정면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앞장섰다가 체포되어 징역 12년이라는 중형을 받고 큰 고초를 겪었다. 서울에서 3․1운동을 목도한 선생은 바로 고향인 장안면으로 내려가 1919년 4월 3일 수백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장안면사무소와 우정면사무소, 우정면 화수리 경관주재소 등을 공격․파괴하는데 앞장섰다. 선생은 화수리 경관주재소에서 일본인 순사를 처단한 후 2년 가까이 피신하였다가 1921년 1월 서울에서 체포되었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21.4.15)과 『매일신보』(1921.1.23) 등 여러 건의 신문기사에서 활동내용이 확인됨으로써 이루어졌다. 무단통치로 일컬어지는 1910년대 일제의 폭압에 가장 격렬하게 투쟁하다 만세운동 사건으로는 이례적이라 할 중형을 받은 사례이다. 한편, 독립만세운동 당시 경기도 안성과 더불어 전국적으로도 격렬한 항쟁을 벌인 것으로 유명한 화성시에서 포상을 신청한 것으로, 독립유공자 포상에 지방자치단체와 보훈처가 협업한 사례이다.
❖ 사제(師弟)가 하나된 독립만세의 함성, 전주 신흥학교의 세 영웅
스승과 제자가 하나되어 3․1운동에 참여한 전주 신흥학교(신흥고등학교의 전신)의 유병민(劉秉敏)․문병무(文秉武)․김경신(金敬信) 세분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유병민 선생과 문병무 선생은 전북 전주에서 미국 기독교계 선교사가 운영하는 신흥학교(新興學校) 교사로 1919년 3월 초 학교와 인근 자택에서 제자인 신흥학교 학생들 십여 명을 대상으로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으로 체포된 유병민 선생은 징역 1년을 받았고, 체포를 피한 문병무 선생도 궐석재판에서 징역 1년을 받았다. 김경신 선생은 위 유병민․문병무 선생의 제자로 조선독립을 역설하는 두 교사의 역설에 공감, 1919년 3월 13~14일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紀全女學校) 학생 및 시위군중과 함께 전주시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뿐만 아니라 동료학생 10여 명과 시내 교회를 순회하면서 “독립운동은 종교단체에서 주동하였으니, 예수교인들은 예배시간에 독립의 성취와 구금된 애국동포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원하여야 한다”고 연설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았다. 주목할 것은 김경신 선생의 독립운동이 3․1운동 참여에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후에도 그는 1921년 11월 전주 동료의 자택에서 ‘워싱턴회의’(1921.11.12~1922.2.6)에 맞춰 제2의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유병민․문병무 선생에 대한 포상은 판결문(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1919.6.24; 12.24)과「수형인명부」, 김경신 선생에 대한 포상은 판결문(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1919.6.24; 1922.3.13, 대구복심법원, 1919.7.28.,1922.5.1, 고등법원, 1919.10.9)과 「수형인명부」등 행형기록에서 공적내용이 확인되어 이루어졌다. 한편, 세분은 전주시에서 포상을 신청한 것으로, 지방자치단체와 보훈처가 협업한 사례이다.
❖ 전남 나주에서 광주학생운동의 도화선이 된 박기옥 선생, 서울에서 광주학생운동 동조시위에 앞장선 최현수 선생
전남 나주에서 광주학생운동의 도화선이 된 박기옥(朴己玉) 선생과 서울에서 광주학생운동 동조시위에 앞장선 여성 독립운동가 최현수(崔賢守) 선생께 대통령표창이 추서된다.
박기옥 선생은 1929년 10월 말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등교길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에게 희롱을 당해 전민족적 항쟁으로 번진 광주학생운동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이듬해 1월 시험거부 백지동맹 등 학내 항일시위에 참여했다가 퇴학을 당했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 포상기준 개선에 따라 학적부 등에서 퇴학을 받은 사실이 확인되어 이루어졌다. 선생이 희롱을 당한데 격분하여 일본인 학생들을 응징한 사촌동생 박준채(朴準埰, 1990 애족장), 백지동맹(白紙同盟) 동지 이광춘(李光春, 여, 1996 건국포장)이 이미 포상을 받았다.
최현수 선생은 함경남도 원산 출신으로 1930년 1월 서울에서 사립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여 항일격문을 필사하는 등 동료학생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준비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일제의 정보보고(1930.1.15)에 따르면, 선생 등은 광주학생운동 동조시위에 가담하게 된 이유에 대해 동료 학생들에게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사건에 관하여 현재 전국적인 문제로 부상하여 모든 학교에서 이에 동정하여 동맹휴교를 하고 있으나, 이화학교만이 아무런 운동도 하지 않는 것은 면목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사회에서 배일학교로서 숭배를 받아온 체면을 유지하는데 있어서도, 이러한 때에 반드시 뭔가 운동을 하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다는 말로 시위를 하도록 선동”했다고 한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 일제 정보보고(1930.1.15)와 신문조서(1930.1.19; 1.30), 신문기사 등에서 공적내용이 확인됨으로써 이루어졌다. 선생과 함께 광주학생운동 동조시위에 참여하여 고초를 겪은 최복순(崔福順), 최윤숙(崔允淑), 김진현(金鎭賢) 선생에게도 이미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 한글과 국사(國史)의 수호와 보급에 앞장선 민족문화 지킴이, 권덕규 선생
식민지 지배의 엄혹한 상황에서 한글 및 민족사의 수호와 보급에 앞장선 권덕규(權悳奎) 선생께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885년 경기도 김포 출신으로 1921년부터 서울에서 조선어연구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조선어문경위(朝鮮語文經緯)」와 「조선유기(朝鮮留記)」등을 저술하고 ‘한글사’를 설립(1927)했다.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 준비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31년 조선어학회 순회강연에 강사로 활동하였으며, 1934년 진단학회 찬조회원, 1935년에는 조선어사전편찬회 편찬 전임위원으로 활약하였다. 특히 3․1운동 직후부터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해진 1940년대 이후까지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를 돌며 한글보급을 위한 강습회에 강사로 참여하여 한글의 수호와 보급에 전력을 기울였다. 식민치하의 엄혹한 시기에 권덕규 선생의 한글, 민족사의 저술과 보급 활동은 ‘문화 독립운동’의 모범적인 사례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 프랑스 파리에서 조국 독립운동에 참여한 숨은 애국자, 홍재하 선생
이역만리 프랑스 파리에서 조국 독립운동에 참여한 홍재하(洪在厦)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892년 경기도 양주 출신으로 1913년 중국 만주를 거쳐 노령으로 들어가 노동에 종사하다 볼세비키혁명 때 피난을 와 무르만스크까지 왔다. 1919년 11월 프랑스로 건너가 시프를 거쳐 1922년 파리로 이주해 정착했다. 1920년 1월경 프랑스 최초 한인단체인 재법한국민회(在法韓國民會) 조직에 참여하여 7월부터 제2대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동년 9월 시프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파리위원부를 이끌던 황기환(黃玘煥, 1995 애국장)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였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파리위원부의 실질적인 구성원으로 1920년 10월 한국민국제연맹개진회(韓國民國際聯盟改進會) 결성을 주도하여 이 단체의 서기장으로 활약하는 등 국제연맹에서 한국독립운동을 선전하는 일에도 노력했다. 선생의 조국사랑은 광복 후에도 이어져, 제3차 유엔총회(1948.12)가 파리에서 개최될 때 장면(張勉) 등 대표단의 한국승인 외교를 측면에서 적극 도왔고 1949년 파리에 대한민국 공관이 설치될 때에도 이를 후원하였다. 6․25전쟁 중에는 한국적십자회를 통해 적지 않은 기부금을 출연하여 대한민국 주불공사로부터 감사서한을 받기도 했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 작년 일부 언론의 조명 이후 프랑스 거주 후손이 보관하고 있던 선생의 서신(사본), 최신의 연구논문 등을 통해 독립운동 공적을 확인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재법한국민회와 선생의 활동은 한국민이 거주하는 곳이면 어디에서든 독립운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소중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 적의 패전사실을 알려 조국광복의 희망을 전한 염준모 선생
일제말기 단파수신기로 청취한 태평양전쟁의 전황(戰況)을 전파하다 체포되어 고초를 겪은 염준모(廉準模)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38년 3월부터 1943년 2월까지 서울에서 조선방송협회 기술부에 근무하던 중 단파수신기를 만들어 중국 중경,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방송을 청취하고 태평양전쟁의 전황 등을 비밀리에 전파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 2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선생이 단파수신기를 통해 청취한 내용은 “중국군은 일본공군과 교전하여 다수의 비행기를 격추했다”, “재중국 조선동포는 중국정부 원조하에 조선독립의 준비를 하고 있다”(이상 중경 대한민국임시정부 방송), “연합군은 버마전선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큰 전과를 거두었다”, “미국비행기는 도쿄와 오사카 등을 공격하여 군사시설에 큰 손해를 입히고 전부 무사 귀관했다”(이상 샌프란시스코 ‘미국의 소리’[VOA] 방송)는 등 일본군이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선전과는 반대로 일본의 패전이 임박해있음을 알려주는 놀라운 소식이었다. 1942년 말~1943년 초의 이른바 ‘단파방송사건’으로 150여 명에 달하는 인사가 검속되었고 이들 가운데 성기석(成基錫, 1990 애족장), 박용신(朴龍信, 2005 건국포장), 송진근(宋珍根, 2018 애족장) 선생 등이 포상되었다. 선생 등의 위험을 무릅쓴 활동으로 수신된 내용이 여러 경로를 통해 시중에 유포됨으로써 일제말 암흑기에 조국광복의 희망을 갖게 되었다.
"본 저작물은 국가보훈처에서 '2019년' 작성하여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보도자료를 이용하였으며, 해당 저작물은 정책브리핑 사이트 www.korea.kr 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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